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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1/12 13:30:34
Name epic
Subject [일반] 남극점 경주...외전2. 개고기를 먹은 사람들

그린란드 썰매견

아문센이 남극점에 갈 당시 개고기를 먹은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뿐 아니라 최근에도 (주로 영국에서) 이걸 비난한 사람들이 있죠.
주의해야 할 점은 논점이 '개'를 '사람'이 먹었다는데 한정된다는 겁니다. 아문센은 약해진 개를 죽여서 다른 개에게 먹이로 주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사람이 먹는 것보다 이 편이 훨씬 잔혹 합니다.) 그런데 남극에서 이걸 먼저 시작한건 영국의 스콧 입니다. 그 10년 전 최초의
남극점 도전 도중 개를 잡아 다른 개에게 먹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강제적인 동족상잔은 에스키모들이 오래 전부터 종종 해왔던 일이며 북극에서 난센이 먼저 했습니다.
작년말에 '종편'중 하나인 채널A에서 <트로이의 하얀 묵시록>이라는, 그린란드 횡단을 그린 3부작 다큐를 방영했는데 썰매개가 살아있는 다른
개를 잡아먹는 장면을 그대로 방송하여 비난에 시달린 적이 있습니다. 100년 전, 혹은 그 이전의 에스키모나 탐험대들은 어쩔 수 없이 그랬다지만
이 시대에, 더구나 명백한 준비 부족으로 이런 참사를 유발하고 그걸 TV에 그대로 내보내는 작태는 비난받을만 합니다. 직접 보지는 않아서
자세히 얘기하기는 어렵습니다만.)

'힘들게 썰매를 끌어준 충실한 동물'은 개 뿐만이 아닙니다. 영국인들 - 섀클턴과 스콧은 썰매를 끌던 말을 잡아 먹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이 '개'를 먹었다는 것 그 자체가 문제시 된겁니다. 서양인들의 터부에 충분히 공감하지 않는한 좀 이상해 보이는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문센 탐험대만이 개를 먹은건 아닙니다. 남극 탐험 당시 개고기를 먹은 세 탐험대의 상황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1. 아문센 탐험대 1910 ~ 1912

개고기를 조리하는 아문센 탐험대 (TV 미니시리즈 'The Last Place on Earth' 1985 중에서)

남극점 여행 도중 로스 빙붕 지대를 통과하여 산악 지대에 처음 올라가고 난 캠프에서 아문센은 약해진 개들을 도살 합니다. 이제 운반해야 할
짐 - 식량이 많이 줄었으므로 자연히 필요한 마릿수가 많이 줄어들었거든요. 그리고는 도살한 개를 나머지 개들에게 먹이면서 개고기의 일부를
대원들과 나눠 먹습니다.
떠도는 글 중에는 '아문센이 식량이 부족하여 개까지 잡아먹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이 캠프에서 아문센은 극점까지 왕복
60일이 걸린다고 가정했고 그 이상의 넉넉한 식량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실제로는 1주일 이상 덜 걸렸습니다.) 아주 최악의 경우라도
개를 줄여서 개먹이용 페미컨을 먹어도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 그냥 지겨운 보존식 대신 맛있는 별식, 신선한 고기가 먹고 싶어서 먹었느냐.
이것도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목적은 '괴혈병 예방'이었습니다. 괴혈병은 장기간 썰매 탐험의 전형적인 장애였고 아문센은
신선한 고기가 괴혈병을 막을 수 있다는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노르웨이 또한 개고기 먹는 문화는 없었고 아문센을 비롯한 대원들 또한 개고기를 먹는건 생애 처음 이었습니다. 몇몇은 처음에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먹고난 소감은 다들 '너무 맛있었다.'였습니다. 꼭 개고기가 입에 맞아서라기 보다는, 맛과는 거리가 먼 보존식 위주의
식사만 해왔으니 그럴만 했죠. 그들은 개고기를 '야채가 많이 포함된 페미컨'과 함께 끓여서 고기-야채 스튜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2. 모슨 탐험대 1911 ~ 1914

"간은 안돼! 에스키모들이 '개가 안먹는건 사람도 먹으면 안된다.'고 했네."
(위의 이미지와 바로 연결된, '아문센 탐험대' 장면으로 모슨의 호주 탐험대와 별 상관 없습니다. 하지만 '간'은 상관이 있습니다.)

MBC의 '남극의 눈물'에 보면 호주인들이 남극 본토에 세운 '모슨 기지'가 나오는데, 1911년에 호주 탐험대를 이끈 모슨의 이름을 딴겁니다.
(방송을 봤다면 사람을 날려 버리는 엄청난 바람이 인상적이었을텐데, 이는 100년 전 모슨의 탐험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그가 돌아와 쓴 탐험기의
제목이 The Home of the Blizzard 입니다.)

그는 이전에 섀클턴의 남극점 탐험에 참여하여 1909년에 은사인 데이비드 교수와 '자기장 상의 남극점'을 정복하기도 했습니다. 1911년에 독자적인
탐험대를 이끌고 남극에 간 그는 주로 자남극점 인근을 비롯한 광범위한 해안선을 따라 탐험을 하며 상당히 먼 거리를 두고 두 개의 월동 기지를
건설하여 각각의 팀을 따로 운영하기도 합니다.

여름의 몇 차례 썰매 탐험 도중 비극이 발생합니다. 모슨은 니니스와 메르츠라는 두 대원들과 함께 식량 기지를 세우고 베이스 캠프로 돌아가는
도중 이었습니다. 9마리의 개가 끄는 두 대의 썰매와 함께였습니다. 이 때 모슨은 결과적으로 치명적이었던 선택을 합니다. 눈으로 덮인 크레바스에
썰매가 빠질 경우를 대비해 뒤따라오는 썰매에 훨씬 많은 식량을 싣은 겁니다. 이러면 최악의 상황에서 앞서 가던 썰매가 크레바스에 빠지더라도
충분한 식량을 남길 수 있다는 계산 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상상속의 최악을 능가했습니다. 앞의 썰매가 무사히 지나가고난 지점에서 뒤의
썰매가 빠져 버린 겁니다. 대원 니나스와 함께 말이죠. 그리고 식량도 니나스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둘만 남은 모슨과 메르츠는 이제 생존이 최우선 과제가 되었습니다. 식량을 최대한 아끼고 아낀 끝에 결국은 개를 잡아 먹게 됩니다. 개 또한
제대로 먹이지 못했으므로 바짝 말라 힘줄 뿐이었지만 먹어치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개뼈를 우려내 국물을 먹었고- 개 머리까지 먹었습니다.
눈알은 물론 두개골을 통째로 삶아서 나무수저로 뇌를 퍼먹었습니다.
그런데 개고기를 먹고난 얼마 후 메르츠가 급격히 건강이 나빠지더니 얼마 안가 죽습니다. 훗날 학자들은 그가 개의 간을 먹어 비타민A 과다로
인한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분석 했습니다.
이제 혼자 남은 모슨은 자살을 고민하기도 하지만 결국 엄청난 고난을 극복해가며 전진하여 간신히 살아 남습니다. (나중에 그의 생존기를 따로
소개해 볼까 합니다.)

그런데 아문센이 실제로 개의 간에 대해 언급했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저 TV 드라마는 철저한 고증으로 유명한 헌트포드의 Scott and
Amundsen이 베이스이긴 하나 원작에 아주 충실한 편은 아니고- 제가 그 원작을 본 적이 없습니다.;;


3. 섀클턴 탐험대 1914 ~ 1917

개고기를 먹는 섀클턴 탐험대(TV 2부작 'Shackleton' 2002 중에서)

섀클턴의 남극 횡단 탐험대는 미처 상륙도 못하고 웨들해의 해빙에 갇혔다가 배가 난파 됩니다. 그들은 생존에 필요한 것 외에는 다 버린채 얼마간
얼음 위를 전진하여 텐트를 치고 한동안 생활하는데 이 거주지 이름을 '오션 캠프'라 짓습니다. 얼핏 너무 진부한 이름이지만 이렇게 적절한 이름도
잘 없을 겁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바다 위'에 캠프를 건설했으니까요. 가지고 온 식량은 꾸준히 떨어져갔고 대원들이 물개와 펭귄을 사냥하는데
섀클턴은 (몇몇 대원들이 '최대한 식량을 많이 확보해 두는게 좋다.'고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일정량 이상의 사냥을 금지 합니다. 그는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사기 - 대원들의 심리 상태라고 생각했고 잔뜩 쌓아둔 물개고기는 이 얼음 바다 위에서 오래 머무를지도 모른다는걸 의미
하므로 위험하다고 판단 했습니다.

요즘에 와서는 무슨 리더십 교재 따위에서 이 판단을 칭찬하곤 하지만 명백한 오판이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식량 부족에 시달리게 됩니다.
섀클턴이 데리고 있던 썰매개들은 사실 본토에서의 탐험이 어려워진 이상 본래의 가치를 상실한지 오래 였습니다. 얼음 벌판에 짐을 싣고 나아가는데
도움을 주긴 했지만 조만간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려면 더 이상 데리고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몇 마리의 강아지와 탐험대의
마스코트 였던 고양이 '치피'를 살해한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거의 쓸모가 없어진데다 계속 식량을 축내는 개들을 잡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옵니다.
섀클턴의 개는 영국의 여러 공립학교들(중고등학교)의 후원으로 구입했으며 개 일부에 그 학교들의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이제 그 학교 이름이
붙은 개들은 대원들의 식사가 됩니다. 당시 탐험기를 보면 '넬슨'의 맛이 정말 훌륭했다는 식의 기록이 나옵니다.

그들은 절박한 상황이긴 했지만 식량이 아주 떨어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직전까지 개들을 먹일 수 있었다는 것만 봐도 그렇죠. 말하자면 절대
개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면 그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 백kg의 신선한 고기를 포기하는 '바보짓'에 찬성할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겁니다.

1902년, 스콧은 비록 개에게 개를 먹이긴 했지만, 식량이 거의 다 떨어져 굶주리면서도 개를 잡아 먹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때 대원이었던
섀클턴은 돌아오는 길에 괴혈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개고기를 먹으면 상당히 회복할 수 있는 상황에서 말이죠. 어차피 이 때 섀클턴이
죽었더라도 영국인들은 개고기 안먹인 걸로 스콧을 비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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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12/01/12 13:52
수정 아이콘
재밌는 글 감사드립니다.

뭐 중간에 나온 종편 이야기야 뭐 참 뭐 수준을 보여주는게 아닐까 싶네요.



그와 별로도 본문 내용과 마찬가지로 개를 사람이 먹는것보다 같은 동족에게 먹이는게 더 잔인해 보이는데에 동의하게 되네요.
정 주지 마!
12/01/12 13:59
수정 아이콘
사람이 먹는 것보다는 개가 개를 먹는게 참..
몽키.D.루피
12/01/12 14:11
수정 아이콘
한국인이었다면 사골국물에 내장까지 다 고아서 몸보신 했을텐데요 크크
kobis.re.kr
12/01/12 14:32
수정 아이콘
위로부터도 알 수 있지만. 육식동물의 간은 절대로 먹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육식어류에도 이말이 해당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12/01/12 16:32
수정 아이콘
제가 알기로는 육식 동물의 간은 비타민 A가 과다하게 들어가 있어서 먹으면 위험하다고 한 것 같은데 그게 맞는지 모르겠네요.
po불곰wer
12/01/12 17:18
수정 아이콘
다른동물의 간은 모르겠고 북극곰의 간은 먹으면 그대로 황천행이라고는 합니다.
Je ne sais quoi
12/01/12 23:10
수정 아이콘
오랜만에 남극 얘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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